한동안 단편집 읽기에 골몰했었다.
창비에서 출간된 전지영 작가의 <타운하우스> 서평단에 당첨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평단은 다시는 안하겠다고 다짐했던 게 엊그제같은데 또다시 신청을 하게 된 이유는!
전지영 작가가 같은 해 한국일보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수상하며 등단한 괴물작가이기 때문이었다.
상을 두 개나 받은 작가의 글은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하며 막차를 탔는데 이벤트에 당첨이 되어 책을 받았다.
타운하우스.
타운하우스는 소설집의 첫 번째 단편인 <말의 눈>에 나오는 공간적 배경이기도 하다.
여덟 편의 단편 모두 공간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요소라, 통합적인 의미에서 타이틀로 뽑은 듯 하다.
소설 속에 나오는 배경과 인물들이 정말로 살아움직이는 듯 해서 읽고 또 읽었다.
나 역시 다음에 쓸 소설을 어떻게 써야할지 갈피를 못잡고 있는 상황에서
문체나 이야기 구성, 인물 묘사 등 배운 것이 너무 많았다.
전지영 작가는 글을 잘쓴다.
환상에 버무려진 겉멋든 글이 아니라 현실과 맞닿은 생생한 글을 쓴다.
글 속에서 자기연민이란 찾을 수 없고, 결핍된 주인공을 통해 유감없이 그 통찰력을 발휘한다.
단단하고 멋진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여덟 권의 소설 속 세계를 관장하는 신처럼 아주 우뚝 선 사람이다..
가난하고 못배우고 아픈 인물로 고통을 쓰는 것은 어느 정도 스테레오 타입이 서있으므로 비교적, 아주 비교적 쉬운 일이다.
그러나 저택을 가진 교수나, 병원을 운영하는 의사, 재능있는 예술가 등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 겪는
심리적인 갈등을 서술하는 것은 독자로하여금 배부른 투정으로 느껴지게 하는 모순적인 포인트가 없을 수가 없다.
그래서 쓰기 어렵다. 그런데 전지영 작가는 그걸 쓴다.
정말로 많이 배웠고, 독자로서도 재미있게 읽었다.
특히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인 ‘질투’에 대해 다룬 것이 인상깊었다.
어떤 부러움은 동경이 되고, 어떤 부러움은 질투로 빠진다.
내 주변에서, 어쩌면 내가 가질 수도 있었던 재능을 가진 사람은 질투를 받는다.
아주 먼 곳에서 내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가진 사람은 동경의 대상이 된다.
질투하는 무리들을 가장 성가시게 하는 것은 꼼수 없는 순수한 일등이다. 오직 재능으로 온갖 부정을 물리치는 장면을 목격할 때 그들은 미쳐버린다.
<소리 소문 없이>에서는 예술고 학생들간 벌어지는 질투어린 마음을 다룬다.
부자거나, 재능이 있거나, 부자도 아니고 재능도 없는 이들이 예술고에 모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부자들은 열외로 하고, 부자 아닌 학생들 중에서 재능이 있거나 없는 아이들이 싸운다.
이들의 싸움이란 당사자 모르게 떠도는 소문이 주 공격포인트가 되는 것으로
공공의 적 1등을 대상으로 한다.
돈도 백도 없이 순수 실력으로 실기 일등을 하는 이예성.
꼴지를 앞다투는 학생들은 그가 이상한 약을 먹고 실력을 키웠다고 소문을 낸다.
그에 굴하지 않고 이예성은 결국 음대에 진학하여 유학도 다녀오고
독주회까지 연다.
주인공 혜진은 자신이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길이 없기에 꾸역꾸역 피아노를 붙잡아 쥔다.
그리고 겨우 진학한 음대를 중퇴하고 사촌이 운영하는 약국에서 보조로 일한다.
어느날 우연히 만난 예성은 반가운 얼굴로 혜진을 자신의 독주회로 초청하고, 혜진은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연주회에 간다. 그리고 그 무대 위에서
유감없이 발휘되는 재능에 흔들려 집으로 돌아와 간만에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린다.
뭔가 시작해보려고 할 때, 아이가 첫 걸음마를 뗀다. 그리고 혜진은 피아노에서 손을 뗀다.
재능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이야기다.
결국은 꿈을 포기하고, 포기가 아니라 이루지 못하고, 평범한 아내, 그리고 평범한 어머니가 되어 약국 보조로 일하는 혜진과
독주회에서 연주를 하는 예성의 이야기다.
혹시나 나에게도 재능이 있지 않을까, 확신이 아니라 의심을 가지며 건반에 손을 올려보지만 아이가 다가와 다리를 붙잡는다.
꿈과 현실이란 이다지도 멀고, 이미 꿈을 이룬 사람을 향한 질투는 인간의 본능에 가깝다.
<뼈와 살>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만의 예술을 하다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자, 낡은 집에 먹혀들어간 이선과
세상에 먹히는 작품으로 돈을 벌어 먹고 사는 ‘나’의 이야기.
결국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허물어진 집 근처에서 파편을 추리는 ‘나’의 모습이 꼭 이선의 장례를 치르는 것 같다.
예술이라는 것은 무엇이길래
재능이 있든 없든간에 달려들고 보는 것인가.
지리한 지망생 과정을 거쳐 진짜 예술가가 되면 좋은데
그렇지 않다면?
그 지망생 위치에서 평생 머물러야 한다면?
예술을 통해 유명세를 얻으려거나 상을 받으려거나, 지원금을 타려고 하면
세속적이고 흔한 이야기를 쓸 수 밖에 없다.
아니면 나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어설프게 이상한 글을 쓰게 된다 -진짜 천재들이 이미 지어놓은 이야기에 부속품만 바꾸어 뭐라도 해보려는 노력을 나는 표절이라고 부른다.
그런 지망생들 사이에서도 조금 잘하면 질투를 받고, 소문이 떠돈다.
마치 너희들은 평생 지망생이어야 한다며 서로의 발목을 쥐고 있는 것과도 같다.
그런 열등 의식이 추하기만 한가?
아니다. 마음 저변에 추악한 것 하나 품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지영이 쓰는 글에는 내 마음 속 어딘가에 가라앉은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건드린다.
진짜 깨닫는 것도 공감하는 것도 많은 소설집이었다.
*
전지영의 책을 모두 읽고 나자, 이제 내가 할 일이 보인다.
새로운 소설의 시놉시스를 담당자에게 넘겨야 한다.
줄거리는 이미 나왔다. 거기에 인물과 사건의 설정을 조금 더 끼워넣고
이야기 답게 주물러보아야 한다.
와중에 책을 또 샀다.
프로이트 전집(15권을 50년 대여로 39000원에 샀다.), 그리고 한강의 시집이다.
이런 것들은 책을 써놓고 내리 읽어야 겠다.
일단은 써야할 소설이 있다는 것이 기쁘다.
처음 써본 소설, 그리고 새로 써본 소설과 계약한 소설 두 개.
나도 네 작품을 갖게 된다. 아마도 내후년이면 그렇지 않을까 싶다.
지금 계약이 걸린 두 편의 소설을 모두 쓰고 나면.
솔직히 팔리고 안 팔리고는 출판사의 사정이고 (물론 잘 팔리는 좋은 작품을 써야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나는 내가 세운 기획 대로 완성품을 만들어내는 것까지만 잘 수행하면 된다.
말하자면 출판사와 나는 서로 분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 책을 덮으니, 또 다른 한 책을 시작해야 한다.
좋은 책을 읽고, 좋은 글을 쓰고.
끝과 시작이 맞물려 시너지 효과가 난다.
정한아 작가, 전지영 작가, 그리고 나의 한강.
또 이승우 선생님.
이번 달에는 천선란 작가의 SF를 읽어볼 생각이다.
안 읽어본 장르도 가끔씩 읽어 주어야 결핍이 채워진다.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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