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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소년이 온다, 그리고 요며칠간의 계엄 트라우마에 대하여

by 문맹 2024.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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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새벽까지 깨어 뉴스를 보고 있었다.
사상초유라고는 할 수 없지만, 민주주의가 깊게 뿌리내려 당연한 것이 되고 나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안의 평온함은 하룻밤사이 과거가 되었다가 다시 현재가 되었다.
당장에 포탄이 아파트 외벽을 깨뜨리고, 빗발치는 총탄을 피하기 위해 두꺼운 이불을 창문에 덧대는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국회는 이미 많은 상흔을 입었다. 문이 박살나고 창문이 깨졌으니까.

매년 5월이면 광주는 한 집 걸러 한 집이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한참이 지난 오늘에야 그 말이 선득하게 느껴진다.

특수부대들이 들어찬 국회 너머로 초로의 인간들이 모여 시위를 하고 규탄을 한다.
그 사람들 주변으로 10만의 국민이 모여든다.

어쩌면 끔찍한 사변이 될 수도 있었던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계엄령이 선포되었던 한국의 겨울, 한강 작가는 스웨덴으로 건너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서 강연을 하고 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압도적인 폭력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 인간을 구하려는 노력은,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기에 나오는 행동일까.
한강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스웨덴에서 출발하여 한국으로 울려퍼진다.


이미 문학은 한 사회를, 한 시대를, 한 세대를 반영하는 실존철학의 총체다.

카뮈가 쓴 <페스트>에서는 우리가 겪은 코로나 시국의 특성이 아주 잘 반영되고 있다.
방역을 하고, 쥐를 몰아내고, 매일같이 시체를 태우느라 굴뚝에 연기가 항상 피어오르는 그 상황은 방역복을 입고 흰 연기를 뿜으며 곳곳을 소독하는 우리네의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소설 후반부에는 그런 전염병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건강한 쥐들이 태어나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있던 고양이들이 마을로 다시 돌아오면서 일상이 회복되었음을 알린다.
현대사회에서는 비어있던 영화관에 관객이 들어차고, 여행지에 관광객이 몰려들고, 식당가에 손님이 들끓는 것으로 평범한 일상을 알린 것과 마찬가지로.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서도 일상을 알리는 상징이 등장한다. 바로 분수다.
가동을 멈춘 광장의 분수는 희생자들의 목숨과 함께 한동안 물을 뿜어내지 않았다.

사람들은 비극의 색이 옅어져 갈 때야 비로소 큰 목소리를 낸다. 분수를 다시 가동하라고.

그것은 사태에 참여하지 않고, 숭고한 희생에 무임승차했다는 자신들의 죄책감을 지우기 위한 목소리였다.
괜히 더 악악거리고, 날이 선 목소리로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 현재에 알려주는 것은 많다.
그때 희생당한 목숨들이 현대인에게 말해주는 것도 많다.

우리는 과거에 겪었던 부당한 독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국회 앞에 진을 쳤다.
이미 과거의 죽은 자들이 멈춰야 한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전쟁, 역병, 빈곤, 죽음, 부조리.

소설은 인간 생애의 찬란한 면만을 담는 것이 아니라 추악한 이면을 들어 불행의 고리를 끊어내라 말한다.
단지 허구의 거짓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네 삶을 한치의 오차 없이 그대로 반영하고 있지 않은가.

소설을 통해 과거를 들여다 보고, 현재 내 삶에서 지침을 얻는다. 그것이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다.


나아가 내가 문학을 즐기고, 또 쓰기 까지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우리 사회를 글로 남기고, 후대의 누군가에게 메세지를 던지기 위하여.

그리하여 과거의 세대들은 불멸하는 것이다.



계엄은 그날 새벽을 기해 해제되었다.
어느 정도 마음을 놓고, 나는 내 소설을 썼다.

평온한 일상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늦은 밤 깨어 글을 쓰는 것. 그것이 나의 일상이고 잠시간 멈추었던 키보드가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그 일상이 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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