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귀인과 학당귀인이 있다고?
대학생 때 일이다. 친구랑 함께 신점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취업 시즌도 되고 해서 싱숭생숭한 마음에 직업운을 보려고 했다.
그런데 점 봐주시는 선생님께서 이러는 거다.
“와. 이 친구는 문창귀인이랑 학당귀인이 다 들어가 있네. 글 좀 쓰겠다?”
대학 시절 내내 레포트는 무조건 내가 썼다. 해피캠퍼스? 이런데서 사다 적당히 베껴서 가짜 글 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동양사상 교수가 수업중에 내 이름을 호명하는 거다.
이 사람 누구야? 글 좀 쓰네?
점쟁이가 말한 대로 똑같은 소리를 여러 번 들어본 적 있었던 나는 문창귀인이 뭔지 학당귀인이 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기분이 좋아 우쭐했던 기억이 있다.
“쉽게 말해서 학당귀인은 학문적인 글을 쓰는 사람이 갖고 있으면 좋아. 논문 쓰거나 레포트 작성하거나.”
나는 대학 졸업 후 바로 인턴으로 취직한 케이슨데 국내 굴지의 기업이라 대우도 좋았고, 실무적인 일도 배울 수 있어 좋았다.
그때 인턴으로서 내가 했던 업무가 업계 동향을 요약해서 전사로 배포하는 일이었다.
그때도 업무평가차 동향 만족도를 조사해보면 가독성이 좋다, 문장이 명료하다, 이해하기 쉽다, 업계 동향이 한 줄에 요약되어 있어서 좋다 등등 칭찬일색이어서 어리둥절했었다.
왜냐면 나는 그리 힘을 들이지 않고 했던 업무였기 떄문이다.
내가 외국계 기업으로 이직을 하면서 내 후임이 들어와 인수인계를 할 때야 내가 뭔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임의 요약실력은 형편없었다.
학교에서 소논문 쓰는 일도 쉬웠다. 학문임에도 재미있게 읽혀지면 좋겠다는 생각에 다듬고 또 다듬어서 제출하니, 교수가 학생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인쇄해서 돌린 적도 있었다.
암튼 그런 이유로 학당귀인이 있다는 말은 어느 정도 수긍을 했는데, 문창귀인이라니?
“문창귀인은 소설 같은 거 있지? 예술적인 글을 쓰는 데 필요한 거다. 자네는 소설이나 시를 쓰겠어.”
에이. 말도 안 돼요. 내가 딱 그렇게 말했었다.
소설 읽는 것을 아주 좋아하지만 쓰는 것은 글쎄. 생각해 본 적 없는 진로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5년 쯤 지났을까.
브런치에 혼자 써 올리던 서평을 모아 책을 내자고 출판사 측에서 컨택이 들어왔다.
그렇게 나는 학당귀인을 보유한 인문 서적을 출간한 작가가 되었다. 그런데 문창귀인은?
반만 맞고 반만 틀렸구나. 나는 문창귀인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에서 서서히 지워갔다.
그러나 우연한 계기로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든 게 2년 전.
무작정 글을 써서 올리니 내로라 하는 플랫폼에서 계약을 하잔다.
그렇게 나는 소설 작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듬 해 장르문학소설 공모전에서 우수상을 타면서 출간 계약을 또 했다.
화려한 데뷔였다.
물론 지금은 원고를 쓰고, 지우고, 다듬고, 갈아 엎고 고된 작업 중이지만,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 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모든 일들이 진행이 되었다.
문창귀인이 있다는 게 이런 말이구나.
사실 소설 쓰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고, 배운 적도 없는데 술술 잘 써진다.
너무 거만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나 사실이 그렇다.
누구는 장수생이다, 지망생만 몇년 째다 푸념 섞인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나 이렇게 성공가도만 달려도 되나 싶기도 하지만!
나 역시 고민이 있다.
장르를 바꾸고 싶다….
배부른 고민이지만 문창귀인이여, 나를 한 번만 더 도와주소서.
내년에는 다른 장르로 또 공모전에 도전하려고 한다.
위에는 공모전만 되면 뭐든 다 될 것처럼 적어놨지만 공모전 수상자에게도 예외없이 지금 책 시장은 불황이다.
한강 작가님의 노벨상 이슈로 잠깐 불이 붙었지만, 크게 번진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갑작스레 꺼진다.
나는 그렇게 될까봐 두렵다.
공모전 수상자도 책만 내면 다 끝? 이 아니라 계속 도전하고, 계속 이름을 알려야 한다.
발버둥 쳐야 그나마 숨통이라도 트이는 불편한 진실.
작가로 살기로 작정했으면 매일매일 써야 한다.
아직까지는 괴롭고 고되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지만, 영원히 샘솟는 우물은 없다.
나에게도 고갈의 시기가 올 것이다.
그때는 납작 엎드려 쓰기만 해야지. 한탄하고 시간 날려버리면 한 자도 못쓴다.
항상 열심히 쓰자!
프리라이트 트래블러 사고 싶다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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