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쓰면서 잘 안 쓰게 되는 말들이 있다.
너무 현대적인 말들이다.
고전문학을 즐겨 읽는 나는 지금보다 훨씬 옛시대의 정취에 물들어 있었다.
흙길을 걸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마을마을의 주점에서 흥청망청 취하고
여인숙에 머물면서 허연 빵을 뜯어 먹고, 그런 굶주린 삶에서 번뜩 떠오른
삶의 진리를 껴안고 고향으로 달음질 치는….
항상 그랬다. 빨간 머리 앤의 초록 지붕아래 다락방을 꿈꿨고, 키다리 아저씨에 나오는 여학교 기숙생활을 그렸고,
내 책상 아래로 들어가 알록달록한 세계전집을 끌어안고 아주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아빠가 출퇴근 하는 시간은 정확했고, 엄마는 항상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친구들이랑 놀다 오면 언니랑 영어 공부를 하고 드라마를 보고 졸린 눈으로 또 책을 보다 잠들고.
요즘엔 아이들도 스마트폰에 정신이 팔려 있다.
외래어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자연스레 어른처럼 말하고 어른 흉내를 낸다.
나는 그런 세상, 고전문학과 거리가 먼, 을 경계했다.
그래서 내 소설 속에서라도 현대 문명을 나타내는 단어를 의식적으로 소거해 나갔다.
그런데 이제 꼭 그럴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요며칠 젊은 작가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히려 그런 말들이 현대 소설에는 꼭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소설은 결국 시대를 기록하는 일인데, 내 소설에만 현대 언어가 빠진다는 게 말이 안된다.
오늘도 벽 하나를 넘는다.
요즘은 전지영의 <타운하우스>를 읽고 있다.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메세지, 어떤 장소의 지표가되는 다이소 건물, 생크림이 잔뜩 올라간 프라푸치노, 뉴스를 통해 중계되는 커팅식.
문학 속에 우리의 삶이 한가득 녹아 있었다. 그리고 이상하지 않았다.
외래어가 툭툭 튀어나오는 것도, 실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브랜드 이름이 떡하니 문장 속에 자리하는 것도, 전부 거슬리지 않았다.
한국 소설을 읽더라도 한강, 양귀자, 박경리, 박완서의 것들을 들추어보던 나는 통통 튀는 젊은 작가의 소설 속에서
또 다른 재미를 발견하고 있다.
*
어제 오후께에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새로운 소설을 계약했다. 아직은 구두계약이지만.
선인세는 크리스마스 전에 들어올 것이다.
마음이 부르니 더 사고 싶은 것도 없다.
아쉬운 마음도 없다.
이렇게 될줄을 감으로 알고 있었을까.
11월 말부터 나는 뚜껑 열린 샴페인처럼 소비 폭주를 하고 있었다.
괜히 마음이 들뜨고 모든게 다 잘될 것 같은 이상한 기류가 내 방을 지배하고 있었다.
새소설을 쓴다며 키보드를 샀고-물론 어디에도 계약되지 않았고, 수상되지 않았던 날 충동적으로 지른 것이다- 영감을 얻겠답시고 다이어리들을 지르고
마테니, 스티커니 잔뜩 사다 쟁여놨다.
그게 결국은 미리 축배를 든 셈이다.
암튼 이번 소설은 현대 그 자체, 우리 사회의 일면을 그대로 떼어다 붙일 작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못한 것은 소설 속에 어떤 메세지를 담는 것이다.
사건 자체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작가들도 많고, 딱히 교훈을 주지 않고 이랬다, 저랬다 하며 소설을 끝내는 사람들도 많다.
개중에 베스트셀러인 것들도 있다.
그러나 나는 결국 소설이란 내 마음을 담은 그릇이라고 생각하는데 거기에 내 가치관과 메세지를 담지 않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아무개의 바가지를 끌어담아 와 파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내그릇에 담아야 내 소설이고, 내 가치관이 담겨야 내 소설이다.
즉, 나는 소설을 통해 어떤 말을 하고 싶기 때문에 소설을 쓰는 것이다.
완전히 현대풍의 소설을 쓰는 것은 처음이다.
처음이라고 말하기에는 글 쓴 역사가 그리 길진 않지만.
그 역사에 비해 꽤나 큰 보상을 받았고, 그 뒤로도 큼직한 행운이 나를 찾아 온다.
쓰이고 잊혀지고, 쓰였다 사장되는 글도 많은데
내 글은 출판사를 통해 서점에 진열된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너도나도 1인출판을 하는 시대에 작가로서의 자부심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내가 만든 예술을 혼자만의 관상품으로 내버려두지 않고, 인정할만한 출판사에서, 또 그런 서점에서 내 글을 먼저 선보이자고 접촉해오는 데에서 나는 긍지를 느낀다.
내가 그만큼 이야기를 잘 짓는다는 증표니까.
취미 수준을 벗어나 글로 돈을 버는 프로가 되었다는 뜻이니까.
나는 유명작가를 꿈꾸지 않는다.
그저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아이디어들이
글체를 갖추고 책으로 나와 누구에게든 읽혀지기를 바라고,
한 권을 다 읽었을 때 좋은 책이라고 평가를 받는다면 더할 것이 없겠다.
*
암튼 새해에도 돈받고 글을 쓰게 되어 좋다.
2년 전만 해도 꿈도 꿀 수 없었던 작가로서의 삶이 넘어질듯 말듯 걸음을 떼고 있다.
일년에 한두 번은 계약을 하는 것 같다.
이런 날들이 쌓여서 중견 작가가 되는 것이겠지.
아직은 신인 타이틀이 더 좋다.
신인이라는 명목하에 도전을 하고 실수를 할 수 있으니까.
나중이 되어 발전의 증거로 남을테니까.
어제는 좋은 소식을 듣고도 일기를 쓰지 않았다.
너무 들떠서 아무 것도 못했다.
오늘은 마음을 잡고 트리트먼트부터 완벽히 짜보아야겠다.
줄거리, 기획의도, 등장인물까지는 나왔는데
세세한 구성과 설정이 필요하다.
트리트먼트를 다 쓰고도 집필중에 더하거나 빼는 게 많다.
지금 정확히 해야할 것은 큰 사건들과 결말, 그리고 나의 메세지다.
그것만 확실하면 나머지는 등장인물들이 알아서 한다.
참으로 신기한 소설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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