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수 가위>, 범유진
한국 소설 안 읽은지 꽤 됐다. 나는 고전, 그것도 서양 고전 문학을 즐겨 읽었고, 또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다.
떠오르는 젊은 여성 작가들의 이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름 뿐이다.
나는 여러 매체에서 돌림노래처럼 불리우는 그 이름들을 멀리하고, 폴 오스터와, 헤밍웨이와 또 알베르 까뮈같은 낭만적인 과거의 이름들을 끌어안고 살았다.
오늘은 <아홉수 가위>를 읽었다. 첫 장을 펼쳤을 때, 단편 단편 장미 꽃잎처럼 나뉘어진 소설들의 이름을 보며, 나는 ‘또 단편이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엔 장편 소설을 쓰는 작가가 드물다. 다들 짧은 단편을 묶어 내는데 나는 그런 기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열매가 무언가를 집어 삼키는 광경을 목도하고, 또 날개 펼친 쌍둥이의 차력 쇼를 보면서, 그리고 귀신이라는 이미지가 영화<링>에 등장하는 사다코에서, 수다쟁이 옆집언니로 바뀌었을 떄, 어둑시니의 이야기를 마저 읽기도 전에 나는 완전히 벅차올라 감상을 휘갈기고 말았다.
범유진 작가의 소설에는 여성이 숱하게 겪어온 일상에서의 차별과 추행, 그리고 첩을 들이는 것이 물마시는 것 만큼이나 쉬웠던 때의 비극을 이야기로 빚어냈다.
그리고 상상력으로 가해자들을 단죄했다. 모두가 쉬쉬하면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러나, 누구라도 그것이 범죄라고 지적을 하면, 그것이 죄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겉으로 나서지 않더라도, 적어도 한 번은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이는 모든 약자에게 통용되는 이야기다.
이 소설은 문제를 지적하고, 나아가 일관되게 권선징악이라는 메세지를 전하려고 노력한다. 선한 것이 효율과 비효율로 설명되는 시대에는 보기드문 주제다.
착하게 사는 것, 착한 사람들이 복을 받는 것. 이 구시대적인 메세지에서 오히려 인생의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은 또 무엇인가.
악은 더 큰 악에 굴복하지만, 선은 더 큰 선으로 합류한다.
악은 한 명의 독재자 뒤로 줄을 서지만, 선은 모두를 살기좋게 만든다.
<꿰맨 눈의 마을>
1.
조예은의 소설이 맞나? 여러 번 표지를 확인했다. 정말로 깊은 감동이 있었다. 선하게 살기, 편견을 덜어내기, 그리고 정직하게 살기.
고리타분한 인생의 가치들이 아름다운 동화로. 눈 앞에 펼쳐진다.
고리타분하다고는 했지만, 생애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이런 것들을 지키고 사는 것이 ‘괴물’취급 받는 게 아니라 절대 다수가 지키는 보편적인 가치가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2.
이상한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기존의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이상한’ 것일까.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진화되지 못한 것들이 서로 모여 살면서, 세상 밖의 이야기들을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 변화를 이상한 것으로 간주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 배척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황야 너머에는 전에는 본적 없었던 세상이 있다. 그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어놓은 선 밖으로 나가는 것을 죽음보다 무서운 것으로 여긴다.
그 모든 변화를 겪어볼 생각은 못하고, 그 자리에 고여 썩는 것이다.
<오렌지와 빵칼>
1.
초반부는 그리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으나, 결말을 보고나서 되돌아 보니, 그마저도 재미있게 느껴진다. 주인공들은 철학적 개념으로써의 즉자와 대자를 차용하고 있다.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도덕적인 관념을 기준으로 읽어보면 더욱 재미있다.
가끔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실체 없는 허구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이 소설이 그 지점을 명확히 짚어준 것 같다.
모두들 개인의 본능적 자유와 사회적 기준을 따르는 도덕 사이에서 고뇌하는 시간과 마주하는 순간들이 온다. 지켜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의 괴리는 지극히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표출하고자 하는 대단한 신념을 가지고 사는 것도 아닌데, 유독 이 소설이 즐겁게 읽힌 이유는 무엇일까.
날카로운 칼 끝으로 쓴 글처럼 느껴진다. 시원하다. 아무도 긁어주지 않는 지점을 아주 콕 찍어낸 소설.
혹시, 작가가 <시계태엽 오렌지>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도 잠깐.
2.
내 이상향과 본성 사이에는 통제선이 있다. 그 ㄱ선은 학습되어진 도덕과 양심이 그어놓은 것으로, 힘겹게 그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영아에게는 통제선의 수위를 높이는 친구, 은주가 있다. 아마도 그의 초자아를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나 역시 초자아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으로서, 혹시나 은주같은 인물처럼 보여지지 않을까 살짝 걱정이 됐다.
분명 옳고 곧은 길을 걸어가는 은주는 영아의 무분별한 머릿속에 체계를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수원은 영아의 남자친구. 영아는 은주와는 달리 그리 견고하지 않은 울타리를 두르고 있는 수원을 ‘익숙’하게 여기고 있다.
어느날, 영아가 일하는 유치원에는 별난 아이 ‘은우’가 들어와 갈등을 조장하고 분란을 일으킨다.
영아는 은우를 데려다주는 임무를 맡아 그의 엄마가 일하는 빵집 ‘나루터’로 간다. 그곳에서 영아는 심리치료를 받아볼 것을 권유받고, 마침 수원 역시 같은 치료센터를 추천해 주어, 이끌리듯 혹은 떠밀리듯 치료에 응하고 만다.
그 치료는 영아의 통제선을 붕괴시키고, 영아는 처음으로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면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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