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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에 취하지 말자

by 문맹 2024.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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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주 어렸을 때 나도 마주한 적 있는 어떤 커다란 벽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


자아 비대는 어린 아이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이다.
세상에 태어나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얼마나 귀하게 컸겠나.

뭘 하든 예쁘다, 잘한다 칭찬만 해주고 어린 아이라고 뭐든 우선권을 주니
처음 만나는 사회에서 좌절을 느끼고 실망할 수 밖에.

불행히도 유치원이나 학교에 들어가면 자기보다 더 예쁘고, 잘생기고, 말도 잘하고, 체육도 잘하고, 하물며 키가 더 큰 친구들도 많고,
반 아이들 모두에게 고르게 칭찬과 애정을 나누어 주어도 소외감과 박탈감에 괴로워하는 아이가 생기게 마련이다.

자기보다 잘난 상대를 만나면서 사회에선 내가 최고가 아님을 배워가는 시간.

그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송곳으로 찔리는 아픔이 될 수 있다.

바로 못난 자기를 인정하기 싫은 사람이다.

어렸을 때, 초년생일 때, 초보일 때 반짝 비춘 가능성만을 인지하고
그것이 자신의 성과인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보면

처음 만나는 사회의 벽을 통과하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벽은 보기 싫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죽을 때까지 그 벽은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부딪쳐서 깨야 겨우 낮아지는 벽은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내 위치가 어딘지 여실히 알려주곤 한다.


알량한 인정욕구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또래에 뒤쳐졌다는 박탈감뿐이다.

인정을 받고 싶으면 실력이 있거나, 재능이 있거나, 아니면 기깔나게 노력을 해서 합격선 비슷하게나마 도달을 하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운으로 승부를 보거나 해야 된다.

그러나 아무것도 갖추지 않았으면서 성공만을 바라는 작자들은
아직도 유아기 때 세워진 그 사회의 벽을 등지고 서 있다.

꺨 힘이 없으니 그런 벽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눈감고, 귀막고, 싫은 소리 하는 사람과는 연을 끊고
스스로를 벽 안에 가두어 고립되는 것이다.


자신의 모자란 부분이 보기 싫은가?
그것은 자신이 그 단점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실력 없고, 재능 없고, 운까지 안 좋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아닌 것은 포기할 줄 알아야 하고, 새로이 길을 찾는 것도 그 벽을 허무는 방법 중 하나다.

죽을 때까지 그 벽 안에 스스로를 가둔다면 언뜻 내비춘 가능성마저 퇴색되고 만다.

희미한 빛이나마 있을 때 벽을 깨부수어야 한다.


*


내가 소설을 쓰면서 느끼는 것들이 있다.
반짝 떠오른 아이디어로는 절대 소설을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단편을 쓰든 장편을 쓰든, 절충해서 중편을 쓰든 다 해당되는 이야기다.

이야기를 끌고가는 힘은 덧붙이기와 빼기에 있다.

아니면 쳐내고 기면 덧붙여야 한다.

그러나 그 사회의 벽을 못넘은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사장시키는 것이 아까워서
안 되는 이야기를 붙잡고 늘어지는 우를 범한다.


먹히는 이야기든 안먹히는 이야기든 다 내 머릿속에서 나온 나의 고유한 글이다.

그들 중 어느것이 중간에 사라지고 마지막까지 살아남는지는 중요치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버리고 더해서 결과적으로 좋은 이야기가 되었느냐하는 것이다.

내 글을 객관적으로 보는 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눈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하면, 많이 읽어야 길러진다.

그냥 아무거나 많이 읽는 게 아니라 좋은 작품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연민을 빼고 내 원고를 타인의 원고처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썼으니 당연히 재밌어야 해!

이런 심보는 완전히 자기애에 매몰된 사람들이나 갖는 못된 마음이다. 버려야 할 태도고.

내가 썼어도 별로일 수 있다.
내가 썼지만 정말 아닐 때도 있다.

그럴 땐 삭제하지 말고 파일 복제를 한다.

그렇게 잘못된 발자취를 그대로 남겨둔 채로, 새로 복제된 파일에 새 이야기를 쓴다.

분명 나중에 읽어 보았을 때 그런 결단이 옳았음을 몸소 느끼게 되는 때가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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