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따듯해지는 소설 한 편,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1.
1장의 서술부가 완전히 나에겐 고전의 향수를 불러 일으켰다. 서민층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장면들은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본 뒷골목의 향취를 닮아 있었다.
1장만 읽어도 알 수 있었다. 이 소설은 고전의 반열에 들 것이라는 것을….
2장부터는 인물에 대한 역사가 나온다. 작가에게는 아이를 낳는 것과도 같은 캐릭터 소개의 시간. 단 1분 만에 그 캐릭터는 죽음을 맞이하기도, 또한 영생을 부여받기도 한다. 데미안이나 뫼르소가 그러하듯이.
1985년의 젊은이들이 대도시로, 선진국으로 떠나고, 그저 그런 사람들은 남아서 가난에 허덕이는 아픈 시대의 이야기다.
3장. 아주 평범한 일상 속에서 펄롱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두들 무엇을 향해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는지 의문을 가진다.
그리고 수녀원의 아이들을 만난 날, 인간으로서의 책임과 처음 마주하고 그 아이들도 어려운 처지에 있었던 자신과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단조로운 삶을 살다보면, 아주 새로운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자하는 충동이 생긴다. 그런 것들은 어느 집 부인의 가슴 윤곽에서, 변두리 수녀원의 바닥을 닦는 소녀에게서 생겨나는 것 같다.
그리고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간 날, 한 여자애를 만나고, 펄롱은 인생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큰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2.
어쩌면 이렇게 자연스러울까. 아주 사소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특별하다. 요즘 천재병 걸린 작가들이 독특하고 유별난 소재로 ‘특이하게, 더 특이하게’를 외치는 가운데, 그런 소설들은 정말 소설로만 머무리고, 키건의 소설처럼 시대와 인생을 담고 있지 않다.
작품이라기보다 자의식을 전시하는 데 급급한 멋부린 텍스트만 보다가 순수하고 깨끗한 글을 보니, 내 탁한 눈도 맑아지는 것 같다.
이 목가적이고 서정적인 텍스트에서 현대인들이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나, 이제는 너무 희미해져서 존재하는지 조차 모르는 ‘양심’에 대한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완독할 필요성이 있는 소설.
3.
인생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아주 어렸을 때 누군가의 선의로 ‘구함’받았던 기억을 더듬어보면 알 수 있다. 나도 그들처럼 남을 ‘구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이유로 신념을 저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끝끝내, 비효율적이더라도, 그 가치를 지켜내는 사람들을 향한 열등감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도 많다.
펄롱은 지금 하지 않아서 평생을 괴로워할 뻔한 ‘일’을 ‘함’으로써 한 인간을 구제한다. 그리고 그동안 이유 없이, 혹은 이유가 있는 ‘선의’에 기대어 살아왔던 ‘사소한’ 나날들에 대해 은혜를 갚는다.
정말 쉽게 읽히는 책이다. 그리고 생각해볼 것도 많은 소설이다. 나는 펄롱이 초반부에서 갖게된 의문에 대한 해답을, 즉시 찾아낼 수 있었다.
예배당에 신을 위해 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허례허식에 취해 단지 내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를 뽐내러 오는 사람들 천지였을 때, 가장으로서, 그리고 사업주로서 가진 의무와 책임의 무게에 숨통이 조여드는 느낌에 무작정 강변을 따라 건넌 펄롱의 모습에서, 그런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펄롱은 양심을 저울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허영으로부터 멀어져, 도덕과 양심에 자신의 인생을 걸고자 다짐하는 과정이 섬세하게 서술되어 있어 나도 모르게 자꾸만 페이지를 넘기고 말았다.
4.
펄롱은 수녀원이 가진 보이지 않는 권력에 양심을 팔지 않고, 쇠창살 달린 창문이 있는 집에서 소녀를 구했다. 그런 선의는 미시즈 윌슨으로부터, 그리고 네드가 가르쳐 준 모든 사소한 친절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나’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 아주 따듯한 소설이었다. 시시한 사랑 얘기가 아니라 전인류적이고도 사회적인 메세지가 담긴 소설이다.